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결하지 못한 바티칸 재정 난국<2>
# ‘모든 악의 근원’ (‘The root of all evil’)
교황에게 빚을 갚는 것이 항상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 시스티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은 모두 면죄부 판매로 자금을 조달했다. 면죄부는 신도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여주는 발명품이었지만, 이 관행은 너무 부패한 것으로 여겨져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자료5>
(Paying the bills wasn’t always so difficult for the pope. The crusades, the Sistine Chapel and Saint Peter’s Basilica were all financed in part by the sale of indulgences—an invention that allowed the faithful to buy a reduction in the time their soul would spend in purgatory, although the practice was considered so corrupt it helped spark the Reformation.)

<자료5>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낚시질로 풍자한 삽화
교황이 면죄부를 미끼 삼아 낚시질로 사람들을 꾀어내는 모습이다. 과거 가톨릭교회는 지금처럼 부채에 시달리지 않았다. 면죄부 판매를 통해 십자군 전쟁, 시스티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비를 충당했고, 이탈리아 농부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면죄부를 판매하는 관행은 너무 부패한 것으로 여겨져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출처: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
19세기 중반까지 교황령은 현재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의 비옥한 농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다. 이러한 상황은 1870년, 새롭게 통일된 이탈리아 군대가 비오 9세로부터 로마를 탈환하면서 끝났다. 이로써 수도 한가운데 약 1.6㎢의 영지가 남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이 되었다.
(Into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the Papal States taxed the rich farmland of what is now central and northern Italy, providing a steady income stream. That ended in 1870, when armies of the newly united Italy wrested Rome from Pius IX. That left a 0.2-square-mile estate in the middle of the ancient capital for what would become Vatican City.)
바티칸은 인구가 주로 사제, 수녀, 교회 종사자로 구성되어 세금 부담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바티칸은 결국 면세 지위를 활용하여 금융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 설립된 은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탈리아와 유럽 기업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인수했다.
바티칸은 불투명한 금융 관행으로 악명을 떨쳤고, 바티칸 은행은 수십 년 동안 자금 밀수 및 자금 세탁 의혹을 포함한 스캔들에 시달렸다. 대표적 사례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켈라 신도나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베르토 칼비와 암브로시아노 은행과 관련된 것이다.
미켈레 신도나는 이탈리아의 은행가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교황 바오로 6세, 1963-1978년 재위)와 절친한 친구였다. 그 결과 1960년대 바티칸 은행이 자산과 투자를 다각화하려 할 때, 신도나는 재정 고문으로 고용되었다.<자료6>

<자료6> 이탈리아 은행가이자 바티칸 재정 고문이었던 신도나
미켈레 신도나는 이탈리아 마피아들과 협력하여 마약 자금 세탁과 세금 회피를 도운 인물로, 당국과 규제 기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바티칸 은행을 통해 마피아 자금을 스위스로 송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처: dagospia.com)
그러나 신도나는 단순히 책상머리에 앉아 숫자나 다루는 은행가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비밀 결사인 프리메이슨 계열의 프로파간다 두에 로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뉴욕의 감비노 가문을 비롯한 미국 및 이탈리아 마피아들과 협력하여 마약 자금 세탁과 세금 회피를 도왔다. 결국 그는 당국과 규제 기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바티칸 은행을 통해 마피아 자금을 스위스로 송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he was working with the likes of the American and Italian Mafias – including the Gambino family in New York – helping them to launder drug money and avoid tax. Eventually, that would often see him transfer Mafia money to Switzerland via the Vatican Bank as a way of evading authorities and regulators.)
신도나는 또한 자신의 자금을 세탁할 통로를 만들기 위해, 은행들을 사들이며 막대한 시간과 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1974년 그가 소유한 미국 내 한 기업이 무너지면서, 그가 구축한 금융 네트워크 전체가 무너졌다. 이로 인해 바티칸 은행이 중개 역할을 한 여러 거래들이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바티칸 측은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That exposed some of the dealings the Vatican Bank was a conduit for, and ended up costing them tens of millions of dollars in the process.)
로베르토 칼비는 19세기 후반에 설립된 이탈리아 가톨릭 은행인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은행장이였다.<자료7> 이 은행은 한때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대출 기관으로 성장했다. 바티칸 은행은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두 은행의 업무는 한동안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특히 당시 바티칸 은행 총재였던 시카고 출신의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로베르토 칼비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강에서 끌어올린 칼비의 시신
칼비는 영국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아래에서 벽돌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목을 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진 위쪽에 보이는 돌이 4개, 주머니에 1개 더 들어있다. 그의 주머니에는 또한 여러 나라의 화폐들이 종류별로 들어있었다. (출처: 슈피겔)
그는 바티칸 은행과의 협업으로 ‘신의 은행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신도나와 마찬가지로 마피아의 자금책이기도 했으며, 비밀 프리메이슨 조직인 프로파간다 두에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도나처럼 칼비도 마피아를 대신해 대규모 불법 거래를 할 때 바티칸 은행을 중개자로 자주 이용했다.
(And like Sindona, Calvi often used the Vatican Bank as an intermediary in the large, illegal transactions he was making on behalf of the Mafia.)
결국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그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1970년대 후반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수십억 리라 상당의 불법 거래가 드러났고, 더 깊이 파고들자 15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가 은행에 숨겨져 있던 것이 밝혀졌다. 당시가 1982년이었으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50억 달러에 해당한다. 또한 칼비와 바티칸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 서신이 오고 갔으며, 이는 교황청의 고위 인사들이 이 은행이 어떤 종류의 거래에 연루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And there was correspondence between Calvi and people in the Vatican which showed that senior figures in the Church were aware of the kinds of transactions it was involved in.)
암브로시아노 은행이 도산하자, 바티칸은 해당 사태에 대한 ‘도덕적 책임’으로 2억 2천만 달러 이상을 은행 채권자들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한편 칼비는 위조 여권을 들고 이탈리아를 탈출했지만, 불과 일주일 만에, 영국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아래에서 벽돌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목을 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수천 달러의 현금도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이후 이탈리아 법원은 타살로 판단했는데, 이에 마피아가 은행 부도로 인해 날려버린 자금에 대한 복수로 살해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바티칸 은행장이었으며 신도나와 칼비 모두와 함께 일했던 마르친쿠스 대주교는, 은행이 무너지고도 1989년까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당국은 1987년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그는 바티칸 시국의 외교적 면책 특권을 주장하며 체포영장 시효가 끝날 때까지 바티칸에서 머물렀다. 그는 끝까지 체포되지 않은 채 2006년에 생을 마감했다.<자료8>

<자료8> 1964년, 마르친쿠스(맨 왼쪽)와 교황 바오로 6세
당시 바티칸 은행장 마르친쿠스 대주교는 신도나와 칼비 모두와 함께 일했지만, 바티칸의 특권을 이용해 끝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바오로 6세는 자신의 친구 신도나를 바티칸 재정 고문으로 고용했다. (출처: 뉴욕포스트)
1999년, 바티칸 은행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부터 소송이 제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약탈한 유대인과 기타 희생자들의 금과 자금을 바티칸 은행이 수용하고 세탁했다는 혐의였다. 1946년 美 재무부 문서에 따르면, 약탈한 자금 “약 2억 프랑(1997년 가치로 1억 7천만 달러)이 원래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 돈의 대부분이 나중에 일명 “바티칸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로 흘러들어 나치 도망자들의 생활을 지원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5년, 역사학자 제럴드 포스너는 그의 저서 『신의 은행가들: 바티칸의 돈과 권력의 역사』에서 바티칸이 매년 히틀러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교회세(Kirchensteuer)’를 받았다고 적었다.
<자료9> 1943년 당시만 해도 오늘날 가치로 17억 달러에 달하는 이 교회세는 바티칸 은행을 통해 납부되었는데, 이는 다른 서방 은행이 거래를 추적하는 것을 피하고 전시 재정 제한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가톨릭교회는 바티칸은행을 이용하여 수십억 달러의 전리품과 전시 약탈금을 은닉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나치 정보원으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와의 관계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바티칸은 전체 재무 기록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료9> 제럴드 포스너의 책『신의 은행가들』
우리나라에서는 부제인『교황청의 돈과 권력의 역사』를 제목으로 하여 2019년 출판되었다. 교황청의 권력 이동과 막대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나라와 수단을 가리지 않은 추악한 경로와 진실을 폭로하는 책으로, 최근에 나온 교황청의 실체를 파헤친 책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아마존)
# 자금 세탁 경고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되었을 당시, 연이은 스캔들은 금융 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유럽 금융 범죄 감시 기관인 머니발이 바티칸의 계좌를 조사한 결과, 2012년 7월, 바티칸은 여전히 16개 핵심 금융 기준 중 절반 가량에서 실패하고 있었고, 머니발은 바티칸에 자금세탁과 테러 자금 조달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2013년 1월,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인내심을 잃고 바티칸 시국으로의 모든 전자 결제를 차단했다. 그 결과 관광객들은 ATM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은행 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제들은 결제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 달 만에 베네딕토 16세는 사임을 발표했다.<자료10>
머니발은 바티칸 은행이 자금 세탁 방지 규정을 강화하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부 보고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연금 기금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기금의 약 3분의 1이 부동산에 엉뚱하게 묶여 있었고, 직원들은 은퇴 자금을 더 많이 불입해야 했으며, 전체 기금은 최대 15억 유로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 부채는 상당한 개혁 없이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금의 바티칸의 대처는 ‘개혁’보다는 ‘위기 모면’에 더 가깝다. 이는 바티칸 내부에서 일반적으로 선호되지 않는 자질, 즉 급진적인 사고, 즉각적이고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릴 의지가 있어야 한다.
# 예산 지출 절감
바티칸 경제사무처는 예전에는 연례 선교 예산을 발표했지만, 2022년 이후로는 발표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 발표된 예산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교황청의 연간 운영 비용은 연간 7억 9,600만 유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며, 베드로 성금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운영 자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운영 손실은 3,340만 유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베드로 성금은 2023년에 수입의 90%를 바티칸 운영 비용으로 할당했다.
2023년 10월, 바티칸 경제사무처 장관 막시미노 카발레로 레도는 바티칸이 수년간 비용 절감 조치에도 “연간 5천만~6천만 유로”에 달하는 구조적 예산 적자를 겪고 있다고 말하며 바티칸의 재정적 “위기”의 규모를 시사했다. 카바예로 레도는 또한 바티칸이 “지출 삭감만으로 적자를 메운다면, 로마 교황청에 속한 53개 기관 중 43개를 폐쇄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교황청 경제사무처 장관실의 한 관계자는 2월 더 필러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바티칸이 ‘망하기에는 너무 크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특히 바티칸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는 경고했다.
이제 문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후임자 레오 14세에게 넘어갔다. 새 교황에게 있어 안좋은 소식은, 그가 물려받은 상황 때문에 낭비할 시간도, 대처할 여유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자료11>

<자료11> 9일,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신임 교황 레오 14세
바티칸의 경제적 난제는 이제 레오 14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새 교황에게 있어 안좋은 소식은, 그가 물려받은 상황 때문에 낭비할 시간도, 대처할 여유도 별로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가디언)
<참고 기사>
– 월스트리트 저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결하지 못한 바티칸 재정 난국”, 2025년 5월 6일.
– 더 필러, “교황 레오의 책상 위에서: 바티칸 재정 문제 해결”, 2025년 5월 13일.
– RTE, “예언자들과 상실자들: 바티칸 은행에 대한 도전은 계속된다”, 2025년 5월 17일.
– 텔레그레프, “바티칸, 무솔리니가 약탈한 에티오피아 보물 반환 요구에 직면”, 2025년 2월 11일.
– AP통신, “교황, 원주민 전리품과 유물 반환 의지 밝혀”, 2023년 5월 1일.
– BBC, “베치우 추기경: 바티칸 관리, 이례적인 사임으로 강제 해임”, 2020년 9월 26일.
– 로이터, “해임된 바티칸 감사원장,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 2024년 1월 25일.
– 알자지라, “바티칸의 혼란스러운 재정: 교황 레오 14세는 이를 정리할 수 있을까?”, 2025년 5월 9일.
– NCR온라인, “바티칸을 상대로 한 나치 전리품 소송 기각”, 2009년 12월 31일.
– LA타임즈, “미국 문서, 바티칸과 나치 금괴 연결”, 1997년 7월 23일.
– 유러피안CEO, “바티칸이 저지른 5대 재정 범죄”
– 더 필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의 재정에 대해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나요?”, 2024년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