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출신 테러리스트, ‘공포의 사제’ 패트릭 라이언
IRA와 리비아 무기·자금 중개자
폭탄 테러 타이머 개발해 악명
로마 가톨릭 사제였으나 폭력과 파괴의 길을 걸었던 패트릭 라이언이 2025년 6월 15일, 94세로 사망했다. 열렬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수년간 임시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사이에서 무기·폭약·자금 거래를 중개했다. 그는 IRA 폭탄 공격의 핵심 도구가 된 소형 지연 타이머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의 타이머는 1984년 브라이턴 그랜드 호텔 폭탄 테러(마거릿 대처 총리 암살 시도), 1979년 워런 포인트 매복(군인 18명 사망), 1982년 하이드 파크 폭탄 테러(군인 4명과 말 7마리 사망) 등 주요 사건에 사용됐다.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그를 ‘공포의 사제’, ‘악마의 제자’, ‘개 목걸이를 찬 악마’ 등으로 불렀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후회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더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도 우리가 아주 못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1969년 북아일랜드 내전 발발 당시, 라이언은 영국 동런던 바킹에서 사제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무에 회의를 느끼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수도회 기금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고, 그 돈 대부분을 IRA에 건넸다. 1973년 사제직을 떠난 뒤 스페인 베니돔을 거점으로 유럽 전역에서 자금 모금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IRA와 카다피 정권을 연결하는 핵심 연락책이 되었다.
1975년 제네바에서 IRA 자금을 입금하던 중, 그는 시계 가게에서 ‘메모 주차 타이머’를 발견했다. 주차 만료를 알려주는 장치였지만, 라이언은 이를 장시간 지연 폭탄 타이머로 개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IRA는 결함 많은 타이머 때문에 조기 폭발 사고가 잦았고, 때로는 조립 중에도 폭발했다. 라이언이 맞춤 제작한 타이머는 IRA 폭탄의 필수 부품이 되어, 이후 20년 동안 수많은 테러 공격에 사용되었다.
1980년대 들어 영국 정보부가 그의 활동을 파악했지만, 그는 다섯 차례 체포돼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네덜란드에서 영국군 3명이 사망한 사건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6월 30일, 벨기에 경찰은 브뤼셀의 안전 가옥에서 폭탄 제조 장비와 거액의 현금을 발견하고 그를 체포했다. 영국은 즉시 송환을 요청했으나, 벨기에와 아일랜드 당국은 ‘모호한 혐의’와 ‘공정한 재판 가능성’을 이유로 거부했다.
대처 총리는 아일랜드 정부의 거부에 격분했으며, 1988년 12월 유럽 정상회의에서 아일랜드 총리 찰스 호히에게 “그의 계좌에는 리비아에서 보낸 74만 파운드가 있었다”고 직격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고, 라이언은 오히려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비록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IRA 정치조직 신페인당의 지원을 받아 3만 1천 표를 얻었다.
1990년 그는 ‘장기간의 불법적 부재’와 ‘상관의 지시 거부’로 수도회에서 제명됐다.
2019년 그는 BBC 북아일랜드의 스포트라이트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행위에 실제로 관여했는지 묻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100%입니다.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