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46>콩고, 르완다 집단학살, 신이 허락한 살육인가-①
올해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80주년이 되었다.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비극을 경험한 인류는 집단살해방지 협약을 체결하고 전범을 처벌하는 등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곳곳의 영토 분쟁 등 학살의 참극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형국에 종교계는 저마다 평화를 지지한다 주장하며 학살을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작년 12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을 ‘잔학 행위’라며 비판한 것이 이스라엘 사회의 공분을 샀다.
지난 1월 유대인 뉴스 통신(JNS)에 실린 한 칼럼에서는 이 같은 가톨릭교회의 비판은 바티칸의 ‘역사적 위선’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가톨릭교회야말로 과거 강대국과 손잡고 더 끔찍한 학살을 자행해왔으니, 자신들이 정의로운 위치인 듯 학살을 비판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오랜 과거를 망각한 위선적 행태라는 것이었다. 이때 저자는 콩고와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두 집단학살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콩고와 르완다에선 무슨 일이 있었으며 교회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콩고와 르완다에서 일어났던 집단학살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 신의 사명 내세워 콩고에 도살자가 들어서다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 후발주자로 뒤늦게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든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을만한 나라는 남아 있지 않았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노리기로 하지만 당시 종교적 사명 없이는 식민지화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이에 그는 자신이 기독교적 사명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국제사회에 어필할 계획을 세운다. 가톨릭 국가였던 벨기에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 칭하기에 충분했으며, 가톨릭 신앙과 종교적 언어를 정치적 수단으로 매우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도덕적으로 논란이 되던 ‘노예제 반대’를 주장하기로 했고, ‘노예제 반대, 기독교 문명 전파’등을 기치로 내세운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아프리카에 서구의 기독 문명을 전파하는 박애주의자’로 포장하고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해 이를 선전했다. 교황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그를 지지했고, 콩고는 ‘신의 섭리’로 벨기에의 땅이 될 운명이었다는 평가도 듣는다. ‘가톨릭 군주’라는 이미지로써 결국 그는 국제 사회에서 콩고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콩고를 손에 넣은 그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레오폴드 2세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히틀러’, ‘콩고의 도살자’라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통치자였다.<자료1> 그의 폭정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가 있는데, 바로 손이 절단되어 뭉툭한 팔목을 가진 원주민들의 사진이다.<자료2>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은 당시 만연했던 학살의 참상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고무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 고무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다.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가 덮고 있던 콩고는 레오폴드 2세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그는 악랄한 수법을 동원해 원주민을 모조리 고무 생산에 투입시켰다. 채취할 고무의 할당량을 주고 할당량을 못 채울 경우 채찍으로 매질을 하고, 노동자의 아내나 어린 자녀를 감금 및 강간하고 손목을 자르고, 즉결 처형을 했다. 고무 채취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를 동원해 몰살시키는 등 나라 전체가 피바다가 되었다. 군인들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체의 오른손을 가져와야 했는데, 잘라낸 손이 군인들의 성과로 평가되면서, 잘린 손을 양동이 가득 담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겁박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백만 개의 손목이 잘려나갔고,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지옥이 되었다.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통치했던 23년간, 약 1,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콩고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 비인간적 만행이 일어나는 동안 콩고의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학살 외면한 채 문명화란 이름으로 개종시키다
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이념적, 물적 인프라가 없었다면 레오폴드 정권은 그처럼 빠르게, 그리고 깊이 확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벨기에의 식민 통치는 그 시작부터 ‘문명화’와 ‘복음 전파’라는 명분 아래 가능했고, 가톨릭 선교단은 학교와 병원같은 물질적 필요를 ‘개종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개종시켰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1960년까지 벨기에령 콩고의 거의 모든 학교를 운영했다. 학생의 99%가 개신교와 가톨릭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고, 1960년대까지도 그 비율이 97%로 유지되었다. 이는 순수히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벨기에의 식민지 목표와 맞물려 있었다. 벨기에 식민지 장관 쥘 로랑 장 루이 렌킨은 콩고로 향하는 선교사들과 회의를 소집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공모했다. “종교적 가르침을 이용해 물질적 부에 대한 관심을 막고 가난을 받아들이도록 장려하라.”, “폭력과 협박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여 저항을 억압하라.”, “토착 신앙과 상징을 훼손하여 문화적 회복력을 약화시켜라.”, “교육에서 절대적인 복종을 주입하고 비판적 사고를 방해하라.”, “아프리카 유물과 전통을 악마적이라고 비난하라.”, “아프리카인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라.”, “아프리카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할 때마다 공산주의나 반란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라.”(“A tentative answer to why Vatican wants the beatification of Baudouin”, TheNewTimes, Dec 30, 2024.)실제로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행해졌고, 덕분에 벨기에는 콩고인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교육을 통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문명화시켰다 표현하지만 문명화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곧 문명화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성경을 외우고 찬송가를 불렀고, 1905년 빅토르 로엘렌스 주교의 말에 의하면 “학교가 있는 곳은 모두 기독교화되었다”. 교회는 활발히 개종사업을 벌이는 반면 레오폴드의 잔혹한 식민 통치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오히려 문명화 과정이라며 정당화하거나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도 했다.
일례로 제임스 기번스 추기경은<자료3> 1904년 보스턴에서 열린 제13차 국제 평화 회의에서 콩고 문제를 논의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John Tracy Ellis,『The Life of James Cardinal Gibbons』vol.2., Milwaukee: Bruce Publishing Company, 1952., p.158.) 또한 그는 레오폴드 2세의 통치를 비판하는 운동이 “소수의 불만 세력에 의해, 주로 원주민들의 신뢰할 수 없는 소문에 의존한다”며 레오폴드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아담 호크쉴드,『레오폴드왕의 유령』, 무우수, 2003., p.330.) 이러한 입장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레오폴드 2세의 학살을 두둔했음을 보여준다.
2003년『제노사이드 연구 저널』에 발표된 로버트 와이스보드의 논문『국왕, 추기경, 그리고 교황: 콩고에서 레오폴드 2세의 집단학살과 바티칸』은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한 대규모 학살과 바티칸의 관계를 분석했다. 교회는 ‘문명화 사명’이라는 명분 아래 콩고에서 개종 활동을 수행하며, 현지인들을 기독교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식민 착취 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교황과 교회는 레오폴드의 잔혹한 통치를 알고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프리카에 기독교의 축복을 전했다”든가, “콩고 식민 제국은 레오폴드 2세의 천재성이 세운 기념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잔학한 통치에 대한 비판 속에서 교황이 직접 조사관을 파견했다면 그 의심은 사라졌을 것이지만, 교황은 피의 강과 산더미 같은 시체에 대한 보고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티칸은 레오폴드가 물러날 때까지 그의 잔혹한 정권을 흔들림 없이 지지했다.
그런데 이웃 나라 르완다<자료4>에서 일어난 대학살의 경우, 가톨릭교회는 콩고에서처럼 학살을 가능케 하고 돕고 지지하는 수준을 넘어, 가톨릭 성직자들이 직접 대규모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 100일간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다
1994년 4월 7일, 아프리카 르완다 전국의 라디오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송이 송출되었다. “이웃에 있는 투치족을 죽여라. 그들은 바퀴벌레다. 스스로 보호하고 쓰레기들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것이 진리다. 만약 뱀을 살려둔다면, 그 뱀이 당신을 물어죽일 것이다. 우리는 투치족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는 100일간의 살육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르완다에선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르완다 대학살은 벨기에의 식민통치 시절 깊어진 후투족과 투치족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전체 인구 중 14%를 차지하는 투치족을 우대하고 85%인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으로 인해, 종족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다.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자 다수였던 후투족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후투족은 식민 시절 억압으로 인한 분노를 표출하고 투치족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소규모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가 격추되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는 이를 투치족의 소행이라 주장했고, 다음날 바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르완다 정부는 후투족에게 투치족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한다. 광기에 휩싸인 후투족은 평생 가까운 이웃이자 친구로 지내온 투치족을 상대로 잔혹한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이후 석달이 조금 넘는 기간인 100일 동안 분당 7명, 시간당 400명, 하루에 만 명이라는 유례없는 속도로 르완다 인구의 10%, 약 100만명에 달하는 투치족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해 그 속도가 무려 세배나 빠른 충격적인 수치다. 나치처럼 효율적인 학살을 위한 시스템이나 살상 무기를 이용한 것도 아니었다. 정부는 45cm 길이의 날카로운 칼인 마체테 50만 개를 나눠 주었고,<자료5> 마체테를 이용해 상대를 찔러 죽이고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것이다.<자료6>
하루아침에 이웃이 이웃을, 동료가 동료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의사들은 환자들을 살해하고,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을 살해했다. 겨우 며칠 만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투치족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르완다 전역에서 살인에 이어 집단 강간과 약탈 행위가 이루어졌다. 약 25만~50만 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강간당했고, 이때 태어난 2만 5천명의 아이들은 후에 ‘증오의 아이들’로 불렸다. 술에 취한 민병대원들은 약국을 약탈해 각종 향정신성 약품을 복용하고 버스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에게 여성들과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말라고 독려했다. 이 아비규환은 타국에 망명해 있던 투치족 무장조직,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며 100일 만에 종식되었다.
한 선교사는 “지옥에 악마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 르완다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선교사의 발언을 두고, 국제 저명 인사 위원회(IPEP)의 보고서『르완다: 예방 가능했던 학살』에서는 ‘이 학살의 가장 놀라운 현상 중 하나는 이러한 악마들 중 상당수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