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시론과 기획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르완다 집단학살, 벨기에 가톨릭 사제와 대량학살의 신학<1>

BY.천부교

– 이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에서는 2025년 7월 24일 르완다 일간지 뉴타임즈에 게재된 ‘벨기에 가톨릭 사제와 대량학살의 신학’을 실었습니다.
– 칼럼을 소개하기 전, 칼럼의 배경이 되는 르완다 대학살의 역사와 배경을 간략히 정리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르완다에서는 약 100일 동안 1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20세기 말 최악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르완다 대학살’이라 불리는 이 집단학살의 정식 명칭은 ‘1994년 르완다의 투치족에 대한 제노사이드(1994 Genocide against the Tutsi in Rwanda)’. 사망자의 94%는 투치족이었으며, 1994년 4월 7일부터 7월 19일까지 약 100일간의 학살로 전체 투치족의 77%가 사망했다. 이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적 집단학살이었다.

당시 르완다의 처참한 광경은 혼돈과 절망, 유혈 외에는 찾을 것 없는 아비규환이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가 격추되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후투 정부는 이를 투치족의 소행이라 선동했고, 그동안 쌓아왔던 갈등이 폭발하며 다음날 바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후투 정부는 길고 날카로운 도축용 칼인 마체테 수십만 자루를 후투족에 나눠주었고,<자료1,2> 선전용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 바퀴벌레를 박멸하자.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가족이 죽을 것이다”라며 살육을 부추겼다. 이에 하루아침에 남편이 아내를, 의사가 환자를, 선생이 학생을, 사제가 신도들을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거리에는 살육과 강간이 난무했고, 신음소리와 비명만이 가득했다. 곳곳에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갔고, 널브러진 채 방치된 시체들로 거리는 숨쉬기도 힘들 지경의 악취로 가득찼다.<자료3> 그렇게 르완다의 강물은 핏빛으로 변해갔다.

<자료1> 도로변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고, 바닥에는 마체테가 떨어져 있다.
1994년 5월 8일, 르완다-탄자니아 국경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도로변에 르완다인들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다. 사진의 왼쪽 아래에 보이는 칼이 마체테다. (출처: 로이터)

<자료2> 마체테에 공격당한 투치족 피해자들
(출처: 레자포토, 가디언, 매그넘 포토스)

<자료3-1> 루카라의 성당 앞에서 부패하고 있는 투치족 시신들
1994년 5월 르완다 루카라의 한 성당 앞에 투치족 집단학살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성당 내부에도 시신이 쌓여있다. 이 교회에서는 피난을 왔던 4천 명의 투치족이 후투족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는 단일 사건으로는 최악의 폭력 사태 중 하나였다. (출처: 라디오 프랑스)

<자료3-2> 냐루부예 성당 앞에서 부패하고 있는 시신
1994년 5월 31일, 르완다 키갈리 동쪽 냐루부예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 앞에서 한 남성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성당 입구에 걸려있는 현수막에는 ‘냐루부예 본당, 기쁜 희년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여져 있다. (출처: 인디펜던트)

<자료3-3> 은타라마 성당 안에서 집단학살 당한 투치족 시신들
1994년 6월 17일, 후투족 민병대에 의해 학살당한 투치족 민간인 약 500명이 은타라마 성당 의자 위에 쌓여있다. (출처: 로이터)

<자료3-4> 수백 구의 시신 앞에서 모유 수유 중인 여성
수백 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을 기다리는 가운데, 죽어가는 르완다 여성이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시도하고 있다. 이 여성처럼 살아남은 사람들도 콜레라나 탈수로 죽어갔다. (출처: 로이터)

<자료3-5> 거리에서 부패하고 있는 시체 냄새에 코를 막는 소년
1994년 7월 19일, 르완다 소년이 시체 냄새로부터 코를 가리고 있다. (출처: 로이터)

<자료3-6> 150명의 투치족 시신이 땅에 널브러져 있다
후투족에 살해당한 150명의 투치족 농민들의 시신이 땅에 널브러져 있다.
(출처: 패트릭 로버트 포토그래프)

이 비극을 야기한 민족 갈등의 시발점은 식민지배국 벨기에의 민족 차별 정책이었다. 1916년, 가톨릭 국가였던 벨기에는 르완다를 점령한 뒤 문명화 선교를 내세운 교육과 통치를 했다. 선교사들은 투치족이 성경 속 함족의 후예라는 ‘함족 가설’을 근거로, 투치족을 행정·교육·종교 등 사회 전반에서 우대하고, 후투족은 배제하고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모든 학교 교육을 장악했던 가톨릭 신부들은 학생들에게 함족 가설 사상을 주입했고, 민족 분열과 차별의 논리는 더욱 견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던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자 다수였던 후투족이 권력을 잡았고, 후투족은 식민 시절 억압으로 인한 분노를 표출하고 투치족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제 함족 가설은 그동안과는 반대로 ‘이방인’인 투치를 몰아내자는 목소리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개신교와 가톨릭은 기꺼이 후투를 지지하며 더 많은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일례로 아타나세 세롬바 신부는 신도들을 성당으로 피신시킨 뒤 성당을 불도저로 밀게 하여 2,000명이 넘는 투치족을 그자리에서 몰살시킨 인물인데, 불도저 기사가 정말 성당을 파괴해도 되는지 세 번이나 재차 확인하며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성당을 부숴라. 악마들이 그 안에 들어왔다. 성당에 악마가 있다면 성당은 파괴되어야 한다. 우리 후투족은 수가 많으니 또 다른 성당을 지으면 된다.(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판결문 ICTR-2001-66 中)” 그의 격려와 허락을 받은 불도저 기사는 이제 주저 없이 악마들을 처단하였다.

이 학살을 종식시킨 것은 투치족 무장 단체 ‘르완다 애국 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이하 RPF)’이었다. 7월 4일 RPF가 수도 키갈리의 학살을 진압하고, 7월 19일 민족 통일 정부를 수립하며 공식적으로 학살 종식을 선언했다. 새 정부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후투와 투치로 민족을 나누는 것을 금지시키고, 가해자가 학살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경우 형량을 낮춰주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강경한 무력 보복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처벌이 두려웠던 많은 후투족들은 이미 르완다 국경 근처 콩고의 도시 고마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대규모 망명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다.<자료4,5>

<자료4> 후투족의 도피 행렬
1994년 대량학살 종식 후, 약 25만 명의 후투족이 탄자니아로 도피했다. (출처: 유엔 난민 기구)

<자료5> 르완다 지도
본문에 언급된 주변국과 도시를 표시하였다. (출처: 국경 없는 의사회)

위와 같은 배경에서 당시 한 벨기에 신부는 ‘르완다 지옥에 대한 몇 가지 진실’이라는 글을 쓴다. 그리고 지난달 24일, 르완다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인권 전문가 톰 은다히로는 그 신부의 글을 분석하며『벨기에 가톨릭 사제와 대량학살의 신학』이라는 칼럼을 썼다. 다음은 르완다 언론 뉴타임즈에 게재된 톰 은다히로의 칼럼이다.

찬송가
0:00 0:00
비닐 디스크
CHUNBUKYO
LOADING